김계옥의 작업
주얼리, 세컨드스킨에서 인사이드스킨으로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보통 장신구라고 하면 반지와 팔찌,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브로치 정도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목록은 말 그대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 자체로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담론을 생산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광의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즉 포괄적으로 장신구는 입고 걸치고 걸고 쓰는 것 일체 곧 몸에 착용하는 것 일체를 의미할 수 있다. 몸 자체를 제외한 것 일체, 나아가 가면과 가발처럼 현저하게 몸꼴을 닮은 것(일종의 유사 신체?) 일체, 심지어는 문신처럼 사후적으로 몸의 일부가 된 것 일체를 아우르는 것. 몸에 착용하는 것으로 치자면 옷이 가장 전형적인 경우에 속하고, 따라서 장신구는 옷처럼 입고 걸치는 일종의 작은 옷이랄 수 있다.
김계옥이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입을 수 있는 것, 착용할 수 있는 것에서 주얼리의 존재방식이며 표현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진 정의며 표현이며 형식은 주얼리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며 표현이며 형식의 경계를 넘어선다. 의미론적으로 주얼리와 몸, 주얼리와 정체성과의 관계문제를 아우르고, 형식적으로 주얼리의 경계를 넘어 조각과 공간설치작업, 나아가 빛과 흔적처럼 상대적으로 그 실체감이 희박한 매질을 아우르는 탈조각 내지 비물질조각으로 확장된다. 여하튼 주얼리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얼리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타 주얼리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작가는 제2의 피부로 주얼리를 정의한다. 피부는 전형적인 주얼리보다는 옷에 그 속성이 가깝다(부모님이 물려주신 가죽옷이라는 군대의 우스갯소리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속성은 허물과 껍질과 고치와 같은 상대적으로 더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소재와 매질을 아우른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은 피부(주얼리)를 매개로 몸 안쪽으로 파고들고, 몸 바깥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어떻게 몸과 상호작용하고, 더불어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주얼리가 제2의 피부로서 존재의미를 획득하는가. 일반적으로 주얼리의 의미체계는 닫혀있다. 그 자체 닫힌 체계인 완제품을 일방적으로 착용하고 소비할 뿐, 주얼리와 주얼리를 착용하는 주체 간에 이렇다 할 의미교환이 일어날 개연성은 별로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작가의 주얼리가 일반적인 주얼리와 구별되는 분기점이 된다. 즉 작가의 작업에서 주얼리는 몸과 상호작용하고, 그렇게 상호 작용된 과정이며 흔적을 몸에 남긴다. 몸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에 영향을 미치고 주체의 일부로서 스며든다.
이를테면 그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린 주얼리 내부에는 미세 LED 전구가 장착돼 있다(Aurora). 그래서 주체가 그 주얼리를 착용하면 그렇게 뚫린 구멍을 통해서 은근한 빛이 흘러나온다. 신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유기적이고 가변적인 빛의 패턴이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신체 표면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신체의 동작을 강조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 빛의 패턴을 빛의 드로잉으로 극대화하고, 오브제를 끌어들여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한다(오로라 샹들리에). 그리고 작가는 장신구를 마치 롤러처럼 사용한다(Laced Trace). 장신구의 표면에 조성한 미세요철문양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 표면에 잉크를 묻혀 신체 부위에 그 패턴이며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것. 이로써 일종의 유사문신이랄 수 있는 또 다른 제2의 피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경우로
이처럼 작가는 주얼리를 매개로 신체 표면에서 길을 잃고 부유하는 빛의 패턴이며, 지울 수 있는 문신, 그리고 최소한의 흔적으로 남아 맴돌다가 사라지는 무언의 언술처럼 그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을 부각한다. 여기서 정작 주얼리 자체는 이 일련의 비물질 매질을 드러내는 매개에 머문다. 주얼리를 제안하는 전혀 다른 용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인데, 작가의 초점은 아마도 주얼리 자체보다는 주얼리가 몸에 남긴 흔적이며 존재에 미친 영향과 같은 무형의 실체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무형의 실체는 비누로 만든 반지가 발하는 향기라고 하는 또 다른 무형의 매질을 아우른다(Fragrant). 한갓 장신구가 빛으로 전환되고, 문신으로 전환되고, 무언의 언술로 전환되고, 향기로 전환되는 것. 감성적인 경험을 매개시켜주는 감성적인 오브제로 그 존재방식이 변환되는 것. 그 과정에서 드러난 전환과 변환은 일종의 변태에 해당한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이 상황논리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그 태를 바꾸고 그 꼴을 바꾸는 비정형적이고 비결정적인 존재의 생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 생리에 대한 작은 실험이 일종의 변형오브제를 도입한
이를테면 작가는 근작에서 진즉에 꿈꿔왔던, 그리고 상당할 정도로 실제로 짚어내기도 했던 입을 수 있는, 착용할 수 있는 주얼리에 대한 발상을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 그 어감도 그렇지만 이렇게 풀어낸 주얼리는 주얼리의 전형적인 형식보다는 일종의 옷에 가깝고, 그 옷들을 공간에 풀어놓은 공간설치작업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가녀린 구리선이나 철선을 실처럼 사용하는데, 일일이 코바늘로 뜨개질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와이어 망들의 연쇄로 이뤄진 유기체적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유기체적 형상을 공중에 매달기도 하고, 독립된 형상을 제시하기도 하고, 형상과 형상을 짜깁기해놓거나 한다.
이렇듯 형상과 형상이 어우러져 친근하면서도 낯선 풍경 내지 초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이 친근한 것은 어떤 닮은꼴에 연유한 것인데, 이를테면 옷 같기도 하고,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착용하는 차도르와 히잡 그리고 부르카 같기도 하고, 그물 같기도 하고, 파충류가 벗어놓은 허물 같기도 하고, 고치 같기도 하다. 이로써 작가는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나마 여성적 감수성이며 정체성을 반영하고, 유기체적 형상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풍경이 낯선 것은 그 형상들이 이렇듯 다만 00 같이 보일 뿐(그 자체를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가 결정되는 지점보다는 의미의 지점들을 옮겨 다니는 운동성에 초점을 맞춘 질 들뢰즈의 00 되기 철학에 대한 공감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정작 그 지시적 의미가 암시적이고 명료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그 형태도 의미도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다.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다. 그 망들의 연쇄는 임시적이고 임의적으로 멈춘 것일 뿐, 사실은 무한연쇄를 향해 열려있다. 이렇듯 무한연쇄를 향해 열린 망들의 연결고리가 네트워크를 연상시키고,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연상시키고, 불교의 연기설을 연상시킨다. 망들은 말하자면 인연의 고리며 사슬을 연상시킨다. 흔히 인연은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물에 비유되고, 그 실체를 헤아릴 수 없는 모래에 비유되고, 그 실체가 무한 연속된 고리에 비유된다. 그만큼 아득하고 멀고 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도 의미도 사실은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라 했다. 정해진 형태도 의미도 따로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고 아무데서나 끝낼 수 있다. 그렇게 모든 시작과 끝이 임의적이고 임시적인, 잠정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망이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았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공간 속에다 임의적이고 임시적인, 잠정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들을 풀어놓는다. 하나의 의미가 또 다른 의미를 불러들이고, 하나의 형태가 또 다른 형태와 들러붙는 그런 의미망이며 형태의 집을 열어놓는다.
비록 작가의 시작은 주얼리지만 그 과정에서 주얼리의 경계를 벗어난다. 주얼리의 형태며 기능이며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자기를 표현하는 전망이며 스펙트럼의 한 지점으로 주얼리를 한정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작가의 자기표현의 영역이며 범주는 넓다. 주얼리의 경계를 넘어설 만큼 넓다. 그 넓은 경계가 그렇게 넓혀진 폭만큼 주얼리의 정의며 존재의미를 확장시켜줄 것이다. 아마도 입을 수 있는 주얼리, 착용할 수 있는 주얼리에서 이미 그 확장의 계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세컨드스킨으로서의 주얼리를 짚어내고, 향후 인사이드스킨의 형태를 예고한다. 세컨드스킨이 확장을 향했다면, 인사이드스킨은 심화를 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실현될 형태가 궁금해진다(어쩌면 근작이 그 생각을 실현해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아가 아예 근작 자체가 이미 그 실현의 유비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